[新 실크로드 열전] : 실크로드는 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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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인욱 댓글 0건 조회 6,357회 작성일 15-11-22 14:40본문
① 5천년 전 실크로드의 주인공 ◆강인욱
◆실크로드는 선이 아닌 점들이었다
실크로드를 이해하려면 중국의 신강성과 그 안에 있는 사막을 이해하면 편하다. 실크로드는 신강성의 타클라마칸사막을 사이에 두고 실크로드 남로와 북로로 나뉜다.
실크로드 북로의 북쪽에는 다시 준가르 초원과 칼라마이 사막이 있다. 그 위로는 유라시아 초원 길이 지나간다. 한마디로 실크로드는 사막을 뚫고 사람들이 도시를 만들며 시작된 것이다.
특히 실크로드 남로는 지금도 사막폭풍이 제대로 몰아치면 며칠 동안 고립되는 것은 기본이다. 당연히 이곳에 대한 유적 조사도 쉽지 않다. 현지 학자들조차 여간 조심하지 않는 코스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빙하기가 끝난 후 사방에서 사람들이 농사를 짓기 시작한 신석기 시대가 되어서도 이 지역은 여전히 텅빈 황무지였다. 이 거친 사막에 본격적으로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3000년 전으로 추정된다.
박물관에 전시된 실크로드의 미라를 관람하는 위구르족 여성 /강인욱 ▲ 박물관에 전시된 실크로드의 미라를 관람하는 위구르족 여성 /강인욱이 황량한 실크로드 지역으로 사람들이 모여들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새롭게 개발된 목축경제 덕분이었다. 농사는 지을 수 없는 초원지대라도, 풀을 먹는 동물을 키울 수 있다면 사람은 살 수 있었다.
다행히 당시 이곳 기후는 지금보다 온화했다. 그 덕에 오아시스와 목초지가 군데군데 발달하면서 실크로드에도 하나둘 목축민들의 터전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실크로드’라고 하면 사람들은 먼저 번듯한 ‘길(road)’을 떠올린다. 하지만 원래 실크로드는 선이 아닌 점들이었다. 사막과 초원 군데군데에 세운 거점들이 기원이었다. 그러니까 실크로드는 한나라 때에 들어와서 갑자기 출현한 것이 아니라, 기원전 3000년경부터 서서히 생겨난 실크로드 위의 기존 거점들이 교역로로 이어진 것뿐이다.
누란, 크로이나, 투르판 같은, 우리가 알고 있는 도시들은 바로 수천 년 전 사막에 터잡았던 생활력 좋은 유목민들의 노력이 그 기원이었다.
◆‘죽음의 사막 속 진주’ 로프노르
로프노르(타클라마칸 사막의 유적지)의 최초 유목민은 외형으로는 유럽인 계통으로 분류된다. 이들의 기마와 목축 경제가 지금의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시작됐기 때문이다. 고고학 용어로는 ‘야마 문화’라고 한다. 야마는 러시아어로 ‘구덩이’라는 뜻으로 이 유목민들이 만든 구덩이 무덤을 지칭했다.
로프노르(샤오허) 묘지 전경_/문물(文物) 2007년 10호 수록 ▲ 로프노르(샤오허) 묘지 전경_/문물(文物) 2007년 10호 수록이 첫 실크로드인들이 남긴 대표적인 무덤 유적이 샤오허(小河) 묘지다. 아마 실크로드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도 이 이름은 생소한 사람이 많을 것이다. 이 유적은 신(新)중국 이전에는 ‘로프노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20세기 헝가리 출신 영국 탐험가인 아우렐 스타인(Aurel Stein, 1862~1943)은 이 지역에서 떠도는 도시의 소문을 들고 탐사에 나섰다가 안내원의 잘못으로 물 부족에 시달린 나머지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이 유적은 신중국(1949년에 생긴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에 들어와서 샤오허로 개명되었고, 최근까지도 조사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당시 목축민들은 나무로 만든 배로 관을 짜서 공동묘지 삼았다. 그것이 지금껏 유물로 전해지는 선관장이다.
마치 저승 세계를 헤엄쳐 가듯이 가운데 큰 나무를 중심으로 배로 만든 관들이 배치돼 있고, 그 안에서는 당시의 생생한 모습을 담은 미라들이 발견되었다. 아마 그들은 이승에서 저승으로 갈 때 강을 건너 갔다고 믿었던 것 같다.
로프노르(샤오허) 무덤에서 출토된 어린이 미라 /강인욱 ▲ 로프노르(샤오허) 무덤에서 출토된 어린이 미라 /강인욱안타깝게도 스타인의 발굴 이후 이 유적은 숱한 도굴꾼들의 표적이 됐다. 보물찾기에 나선 사람들에 의해 미라가 사방에 팽개쳐지는 야만적 행위가 자행됐다. 다행히 그 뒤로 전면 재조사가 이뤄졌고, 이곳 원주민들의 삶에 대한 많은 정보가 알려지기 시작했다.
샤오허 유적에서는 미라 외에도 의복과 약초들도 고스란히 발견됐다. 이를 통해 결코 녹록지 않았을 사막 생활의 어려움을 견딘 그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특히 무덤 안에는 마약의 주재료로 알려진 마황이 많이 발견되었다.
마황 속의 에페드린 성분은 환각을 일으키는 부작용이 있지만, 진해거담 치료에 효과가 아주 좋아 전통적으로 감기약으로 애용돼왔다.
얼마 전까지도 환각 작용이 일어나는 감기약 때문에 종종 사회 문제가 된 적이 있는데, 바로 감기약 속의 에페드린 때문이다. 하지만 5000년전 실크로드 인들에게는 마황이야말로 모래바람 몰아치는 건조 지역에서 살아남기 위한 고마운 약제였을 것이다.
샤오허 묘지를 만든 사람들은 글자를 남기지 않아서, 그들이 누구인지 아직 정확히는 알 수 없다. 다만 한나라 시대 이 지역에 거주했던 유럽인 계통의 토하르인이나 월지(月氏) 들의 선조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여하튼 이 샤오허 묘지 사람들이 지난 5000년간 실크로드와 중앙아시아 일대에서 생활해온 유럽인 계통 사람들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다.
◆기원전 4세기 고깔모자 사람들
기원전 6세기 근동 지역에는 거대한 제국 페르시아가 있었다. 대표적인 유적인 수도 페르세폴리스의 벽화에는 당시 왕에게 인사 온 주변국의 다양한 사절들이 묘사돼 있다. 이 중에는 고깔모자를 쓰고 단검을 허벅지에 찬 일련의 사람들도 보인다. 이들은 ‘사키’라 불렸다. 중국어로는 색인(塞人)이라고 했다.
바로 기원전 8~3세기 중앙아시아 실크로드 지역에 넓게 번성했던 이란 계통 유목민들이었다. 유라시아 초원 지역의 스키타이 문화와 함께 유목 문화를 대표하는 사람들이었다. 이 고깔모자의 사키인들은 북쪽으로는 알타이 지역의 파지릭 문화를 남겼고, 남쪽으로는 차마고도 지역까지 널리 흔적을 남겼다.
최근에는 중국 서북부 감숙성의 마자위안(馬家塬)에서 고깔모자를 쓴 인물상이 화려한 사키문화의 황금유물, 마차, 유리병 등과 함께 발견되기도 했다. 기원전 4세기 중국 북방은 임호(林胡), 누번(樓煩) 등 ‘융적(戎狄)’이라 불린 유목민들이 발흥하던 시기였다. 감숙 마가원의 유적은 융적의 일파인 서융(西戎)의 자취다.
이 유적에서 바로 사키인의 흔적이 나왔으니 장건의 서역 착공 훨씬 이전에 이미 실크로드의 사람들은 감숙 회랑을 건너 중국 북방에 거주했음을 알 수 있다. 중국 사람들이 오랑캐(융적)로 부르던 사람들의 일부가 사키인들이었다.
이 실크로드를 넘어온 이란계 사람들은 자신들만의 독특한 동물 장식으로 화려한 황금 장식을 만들었다. 동물 장식은 원래 스키타이 문화를 대표하는 것으로 기원전 7세기 경부터 유라시아 초원 일대에 널리 퍼졌다.
그런데 스키타이계통의 문화권보다 더 남쪽인 중앙아시아 일대에 살던 사키족들의 동물 장식은 얼핏 보면 스키타이식 동물 장식과 비슷하지만 자세히 보면 차이가 있다. 사키의 동물 장식은 뿔이나 부리가 비현실적으로 과장된 괴수문이 특징이다. 기원전 4세기 중국 북방에서도 이런 환상적인 괴수의 황금장식이 널리 유행했는데, 바로 실크로드를 타고 들어온 것이었다.
실크로드의 사키인들이 중국으로 들어온 길은 감숙 마가원 유적인 실크로드뿐만이 아니었다. 훨씬 남쪽의 차마고도로도 교류가 있었다. 그 외에 지금의 중국 사천 서남부에서 티베트를 거쳐 인도 북부를 지나 중앙아시아로 가는 길도 있었다.
티베트와 사천성 산악 지대에서는 전형적인 사키인들의 철제 거울, 동물 장식, 황금 장식이 심심찮게 발견된다. 지금도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중국 남쪽 산악 지역까지 사키 문화가 진출했던 것은 바로 중국과의 교역이 엄청난 이익을 냈기 때문이었다.
장건이 목숨을 걸고 서역의 험한 길을 지나 대하국에 도착했을 때의 재미있는 일이 사기(史記) ‘서남이열전(西南夷列傳)에 전해온다. 이 기록에 따르면, 장건이 중국인 최초로 서역에 진출한 감격을 누리며 저잣거리를 산책하다가 깜짝 놀랐다. 대하국의 시장에는 촉나라의 옷감과 중국 공(邛,사천성 서부) 지방에서 만들어진 대나무지팡이들이 버젓이 팔리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장건이 알아보니 이 물건들은 인도(신독국)를 거쳐 들어온 것이라고 했다. 인도 북부에도 사키인들이 살고 있었다. (석가모니도 사키인의 후예다). 사키인의 자취는 중국 서남부에서 티베트를 거쳐 인도 북부를 통해 중앙아시아로 이어졌다.
이러한 흔적은 운남성 대리시 근처의 석채산 문화의 청동기에도 잘 남아있다. 이곳에서는 다양한 헤어스타일을 한 청동기가 발견되었고, 그 중에는 고깔모자를 쓰고 춤을 추는 사람들이 있다.
서쪽으로는 페르시아에서 동쪽으로는 감숙회랑까지 이어진 고깔모자의 사키인들은 바로 2500년전 실크로드의 진정한 주역이었다. 당시 이 이란계 사람들은 실크로드와 차마고도의 주역이면서 동서교류의 보이지 않는 손으로 유라시아 경제를 움직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크로드의 진정한 주인은 누구
얼마 전 성룡 주연의 ‘드래곤 블레이드’라는 영화가 개봉된 적이 있다. 이 영화는 로마의 군부대가 실크로드를 건너와 중국인들과 갈등하며 정착하는 내용이다. 이 이야기는 순전한 상상에서 나온 것만은 아니다.
영화는 지금도 감숙성의 리첸(骊轩)이라는 마을에는 옛 로마 부대의 후손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데서 시작된다. 중국과 전쟁하다 포로가 된 로마 부대가 감숙성에 눌러앉게 됐다는 스토리는 제법 그럴듯하지만 근거는 희박한 가설에 불과하다.
실크로드의 로마병사설이 등장한 것은 실크로드의 주인공이 로마와 중국이라는 선입견 때문이다. 사실 로마와 중국은 ‘실크로드’라는 것을 만들지 않았다. 당시 나라 사이의 교류도 극히 단편적이었다. 양국 사이에 어떤 교역로가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한마디로 실크로드의 주역은 중앙아시아에 거점을 두고 도시를 세워 교역했던 사람들이지, 로마와 중국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대 이후 중국과 로마를 실크로드의 중심에 둔 정착민들의 생각이 지금까지 영향을 준 것이다.
‘실크로드’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험난한 여행일 것이다. 하지만 5000년도 넘게 이어진 실크로드의 진정한 주인공은 그 위를 지나간 사람이 아니라, 그 위에 터전을 만들고 교역로를 개척한 사람들이다. 20세기에 다시 주목받는 실크로드의 열풍 이면에는 서양인 우월주의가 깔려있다.
수천 년 실크로드 역사에 대한 많은 연구를 봐도 그렇다. 대부분 서쪽에서 사람들이 왔고, 서양인 계통이라는 점에 방점이 찍혀있다. 처음 목축이 시작된 곳이 유라시아 서쪽이고 유럽인종임은 명확하다. 하지만 이를 확대 해석하는 것은 20세기에 득세한 인종주의를 바탕으로 한 서양인 중심주의의 발로일 뿐이다.
아메리카 대륙만 해도 처음 발견하고 인간의 땅으로 개척한 사람들은 3만 년 전 베링해를 건넌 시베리아의 맘모스 사냥꾼이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미 대륙의 발견자로 크리스토퍼 콜롬부스와 메이플라워호를 떠올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한국의 실크로드 인식도 20세기 이후 우리를 지배해온 서양, 특히 미국과 서유럽 중심의 역사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실크로드에 관심이 있는 사람도 기껏해야 스벤 헤딘, 아우렐 스타인 등 100여년 전 서구 여행가들만 떠올린다.
하지만 실크로드의 진정한 주인공은 5000년 전 황량한 이 사막 지대를 개척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목축이라는 새로운 경제에 기마술이라는 신기술로 무장하고 사막 속에 자신들의 거점을 만들고 교류의 길을 이어갔다.
따지고 보면 이태백도 키르기스탄 출신이고, 수많은 서역 출신의 사람들이 동아시아 역사 곳곳에 숨어있다. 그들을 굳이 동서양의 계통으로 가르는 것 자체가 실크로드에 대한 편견이라고 할 수 있다.
실크로드의 진정한 주인공은 피부색으로 결정되는 것도 아니요, 그 위를 지나간 여행자가 전부인 것도 아니다. 바로 지난 5000년 동안 험난한 실크로드에서 정착해 도시를 만들어 거점을 만들었던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실크로드의 주인이었던 것이다. - 강인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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