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 실크로드 열전] : 한나라 장건 서쪽 길을 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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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재훈 댓글 0건 조회 6,099회 작성일 15-11-22 14:42본문
② 한나라 장건 서쪽 길을 뚫다 ◆ 정재훈 (丁載勳)
기원전 3세기 초였다. 중국에서는 전국시대의 분열이 막을 내리고 새로운 제국이 건설될 무렵이었다. 몽골 초원에서는 흉노(匈奴)라 불리는 유목 세력이 월지(月氏)를 물리치고 일취월장하고 있었다.
진시황제(秦始皇帝, 재위 기원전 221년~210년)는 중국의 통일을 다지기 위해 흉노의 성장을 제압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흉노를 황허 북쪽으로 밀어올린 후 장성을 쌓았다. 이때 얻은 땅이 신진중(新秦中)이었다.
하지만 진시황의 통일은 오래 가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제국이 무너지면서 중원은 다시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 틈을 탄 흉노는 다시 남쪽으로 세력을 확대할 수 있었다.
◆초원의 흉노가 중국을 굴복시키다
중국에서는 그 뒤 한 고조(高祖, 재위: 기원전 247년~195년)가 다시 통일의 여세를 몰아 북벌에 나섰다. 흉노를 밀어내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정벌은 실패로 돌아갔고, 오히려 한 고조는 흉노의 계략에 속아 백등산(白登山)에 포위됐다. 뇌물을 주고서야 가까스로 풀려나는 참담한 처지가 되고 말았다.
더욱이 한 고조는 이후 흉노와 화친하는 조건으로 형제의 관계를 맺었을 뿐만 아니라 막대한 물자 등을 제공하지 않으면 안 되는 굴욕을 당했다. 이러한 양국 관계는 그 후로도 상당 기간 지속되면서 중국과 초원 세력 관계의 전형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 때 흉노가 중국을 굴복시킬 수 있었던 데에는 비결이 있었다. 이들은 초원 출신이었다. 불리한 생활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택한 삶의 방식은 유목이었다. 계절에 따른 이동을 통해 가축을 기르는 생산 양식을 기반으로 자신들의 장점을 극대화했다.
특히 초원에서 말을 길들여 이용하는 데 뛰어났다. 초원은 말의 생육 조건에 맞았다. 그 결과 흉노를 비롯한 여러 유목민들은 그 뒤로도 정주 농경 세계와 때로는 대등하게, 심지어 정복을 감행할 수도 있었다.
반면, 농경 민족은 정주를 택했다. 이들은 말타기에 익숙하지 않았다. 그저 말을 수레에 연결해 교통이나 군사용으로 사용했다.
초원의 유목민들은 말을 잘 길들여 직접 올라탈 수 있었다. 말에 올라타 활을 쏘는 기술을 통해 기동력을 극대화했다. 이러한 ‘기마궁사(騎馬弓士)’ 부대의 활약에 힘입어 유목민들은 훗날 대포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군사적인 우위를 누릴 수 있었다.
흉노가 한나라에 대해 우위를 갖게 된 것도 이런 이점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이들은 많은 물자를 얻어냈고 이것을 다시 동서로 연결된 통상로를 통해 유통시킴으로써 보다 많은 경제적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즉, 유목국가는 단순히 초원의 유목이라는 경제 기반만으로 성립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땅이 넓고 물자가 풍부한 곳(地大物博)’인 중국으로부터 물자를 얻어내 이것을 오아시스 주민을 부려 서쪽으로 유통시켜 발생하는 막대한 이익을 기반으로 했던 것이다.
특히, 흉노는 한조에 외교적으로 우위를 점하고 많은 물자를 손쉽게 확보한 후부터 유통마저 자신의 통제 하에서 두게 됨에 따라 교역은 더 활발해졌다. 이로써 ‘비단길’ 즉, ‘실크 로드’라 불리는 통상로는 아직 완전하지는 않지만 활성화의 계기를 얻게 되었던 것이다. 이 길을 따라 중국에서 얻은 비단은 서쪽으로 오아시스 도시들과 인도, 그리고 파르티아(지금 이란)를 거쳐 멀리 로마까지 유통되기에 이르렀다.
◆한 무제, 장건에게 서역행을 명하다
한편, 수세에 있던 한나라에서는 무제(武帝, 재위: 기원전 156~87년)가 등극한 후 황제권 강화에 나섰다. 나아가 대외적으로도 자기 위상 제고에 박차를 가했다. 이런 일련의 과정 속에서 당시 최대 숙적인 흉노를 제압하기 위한 준비에 착수했다.
이 무렵 한 무제는 흉노 포로로부터 “대월지의 왕이 흉노의 선우에게 죽임을 당해 그 두개골이 술잔이 되었고, 그 백성들은 서쪽으로 도망가 흉노를 원망하면서 함께 흉노를 공격할 나라를 찾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무제는 서쪽으로 이주한 대월지와 연합해 흉노를 공격하기로 했다. 이 때 사신으로 파견된 인물이 장건(張騫)이었다.
여기에는 흉노 협공을 위한 외교 전략도 담겨 있었지만, 그가 “흉노의 오른 팔을 잘라버린다”고 한 것처럼 유목 제국의 기반인 오아시스를 분리시켜 흉노를 약화시키겠다는 의도도 숨어있었다.
장건은 기원전 139년경 통역 감보(甘父)를 비롯한 백여 명의 일행을 이끌고 장안을 출발했다. 하지만 월지에 곧바로 이르지는 못했다. 그는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하서(河西)를 지나다가 흉노에 사로잡혔다. 그는 그곳에 10여 년이나 억류당했는데, 심지어 결혼까지 한 다음 머물러 있어야만 했다.
그러다가 그는 끝내 탈출에 성공해 텐샨 산맥(天山 山脈)에 있는 거사국(車師國, 지금 중국 신장위구르자치구 짐사르)과 구자국(龜玆國, 지금의 쿠처)을 거쳐 현재 키르기즈스탄의 페르가나에 있는 대완국(大宛國)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 다음 그는 다시 현지의 도움을 받아 현재 카자흐스탄의 사마르칸트에 있는 강거(康居)를 거쳐 비로소 아무 다리아를 건너 월지의 본영까지 갈 수 있었다.
하지만 당초 장건이 계획했던 월지와의 동맹은 이루지 못했다. 그 사이에 월지 왕은 대하국(大夏國, 지금 타지키스탄)을 차지한 채 번영을 구가하고 있었다. 예전처럼 흉노에 복수하려는 생각은 더이상 갖고 있지 않았다.
장건은 할 수 없이 그곳에 1년여를 더 머물다가 귀국 길에 올랐다. 그는 예전의 아픈 경험을 생각하고 흉노를 피하기 위해 이번에는 길을 바꿨다. 지금 칭하이 성(靑海省)에 살던 강(羌)의 지역을 경유해 귀국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다시 흉노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다행히 마침 흉노 내부에서 선우 사후 분란이 일어나면서 겨우 탈출할 수 있었다. 드디어 기원전 126년 그는 장안(長安)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장장 13년에 걸친 여정이었다. 고난의 길이었지만 소득은 적지 않았다. 그의 첫 번째 여행을 통해 무제는 중국의 서방 즉, ‘서역(西域)’에 있던 로마로부터 파르티아, 대월지, 강거, 대하, 타림 분지의 오아시스 국가들의 사정을 알게 되었다. 무제는 이 지역에 대한 자신의 지배력을 확장하려는 욕심에 다시 장건을 파견하려고 했다.
장건은 첫 번째 여행에서 흉노의 포로로 고생했던 경험에 비추어 이번에는 다른 길을 택했다. 이전 여행길에서 옛날 촉(지금 쓰촨 성)의 물품이 대하국에서 유통되고 있는 것을 본 기억을 떠올린 그는 서남이(西南夷) 거주 지역(지금 중국 윈난 성(雲南省)과 미안먀 등지)을 지나 신독(身毒, 지금의 인도)를 경유하는 노선을 선택했다.
하지만 두 번째 여행은 도중에 인도에 이르지도 못한 채 결국 실패로 끝나버렸다. 본국으로 귀환한 장건은 이번에는 자신의 귀국 전부터 본격화된 흉노 원정에 참여했다. 교위(校尉)라는 직책으로 대장군 위청(衛靑)을 따라갔다.
장건은 그곳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물과 풀이 있는 곳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병사들이 불편 없이 지냈다”라고 한 한서의 기록처럼, 그는 흉노 밑의 오랜 포로 생활 체험을 바탕으로 군사를 잘 운영했다. 그 결과 박망후(博望候)에 책봉될 수 있었다. 그 뒤에 출병 기일을 어긴 죄로 서인으로 전락하는 우여곡절 끝에 다시 무제의 부름을 받고 흉노 정책에 대한 자문을 하게 됐다.
그는 흉노의 서쪽에 있는 오손국의 왕 곤막(昆莫)의 탄생 설화를 얘기하면서 그와 연합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무제는 그의 조언을 받아들였고 장건은 명을 받아 다시 세 번째 서역 여행을 떠났다. 그는 기원전 119년 오손에 도착해 오손 왕의 환대를 받았지만 흉노 협공 동맹의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다. 당시 오손에서는 내부 권력 다툼이 심했고 흉노에 대한 두려움도 워낙 커 한나라와의 동맹을 주저했다.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한 장건은 자신의 부사들을 서쪽의 여러 나라로 파견하고 자신은 기원전 115년 장안으로 귀환했다. 그리고 그는 외국 사절을 맞이하는 대행령(大行令)이 되었다가 이듬해인 기원전 114년에 숨을 거뒀다.
◆사마천 “장건은 구멍을 뚫었다”
서방 여행의 선구자였던 장건의 여정은 파란만장했다. 그와 거의 동시대인인 사마천(司馬遷)은 ‘사기(史記)’에서 장건을 두고 “구멍을 뚫었다(鑿空)”고 기록했다. 그처럼 자신과 그의 부하들이 가지고 온 다양한 정보를 통해 그전까지 닫혀있던 서방 세계와의 통로가 열리게 되었다는 점에서 의의는 대단히 높게 평가된다.
그의 여행 이후 한나라는 서방의 여러 나라와 본격적인 교류를 ‘공식적’으로 시작할 수 있었다. 이로써 과거 간헐적이고 비밀스럽게 이뤄진 사적 차원의 동서 교류는 공적인 차원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물론 장건 이전에도 중국은 서방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상호 교류도 있었다. 그런 사실을 증명해주는 다양한 고고학적인 증거들이 발견되기도 했다. 그 덕분에 장건의 서역 여행 역시 가능했다는 사실 또한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장건의 여행이 높이 평가되는 것은 한나라가 그때부터야 본격적으로 자신이 획득한 서방에 대한 정보를 바탕으로 이 지역에 대한 본격 경영을 시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나라는 그동안 흉노로 인해 막혀 있어 교류가 불가능했거나, 너무 멀어서 교류가 없었던 나라의 공식 사절을 받는 등 이들과의 관계 강화에 적극 노력할 수 있었다.
‘한서'의 장건열전 / 정재훈 교수 제공 ▲ ‘한서'의 장건열전 / 정재훈 교수 제공 일부 논자들은 장건의 서역 여행을 두고 한무제의 장수욕심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흉노 정책과 더불어 자신의 불노장생 욕심이 작용했고, “서북으로부터 신령스러운 말이 온다”는 점괘에 혹해 장건을 서쪽으로 보냈다는 이야기다.
이것은 이후 무제가 이광리(李廣利)를 시켜 대완에 한혈마(汗血馬)를 얻기 위해 원정대를 보냈다는 이야기로 이어지기도 했다는 설명도 있다. 또한 하신(河神)의 소재지를 탐색하기 위한 목적과 결부시켜 설명하기도 한다.
어찌됐건 장건의 여행이 황제의 명령에서 비롯됐다는 점에서 황제 개인의 취향이 반영됐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설명하기도 어렵다. 무제 시기의 흉노 정책은 단순히 그것에만 그치지 않고, 동으로는 조선을 무너뜨린 다음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했고, 서로는 서남이와 월남(越南)에 대한 원정을 벌이는 등 전방위적인 성격을 갖고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흉노와 장건은 동서교역의 기폭제였다
게다가 장건의 여행 이후 서방과의 교류는 과거와 달리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되었다. 특히, 흉노 견제와 관련해 그가 전략적으로 제안했던 오손과의 동맹이 실현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흉노는 서쪽과 단절되면서 내분에 빠져들었다.
급기야 군주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가 한나라로 피신했다가 세력을 회복하는 등 일련의 사태로 연결되었다. 이것은 한나라가 서방과의 교통을 통해 흉노를 약화시키려 했던 전략이 맞아떨어졌음을 보여준다.
흉노에 대한 한나라의 견제 정책 성공의 효과는 한나라의 위상을 확고히 해준 것에 그치지 않았다. 동서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그때까지 볼 수 없었던 다양한 서양 문물과 문화가 유입됐다. 보석류, 공예품, 향료, 석류, 포도, 목재 등과 같은 새로운 물자만이 아니라 서커스 같은 교예단이 들어와 한나라에서 크게 유행하기도 했다.
반대로 서방에서도 중국 특산물인 비단에 대한 엄청난 수요가 일어나 이것을 들여오려는 교통로가 아시아 내륙을 따라 활성화되었다. 이때 확립된 동서 교통로가 바로 오늘날 우리에게도 익숙한 ‘실크로드’의 시작이었다.
따라서 실크로드는 단순한 물자 교역로만이 아니라, 문화적인 측면에 있어서 여러 문명권을 연결하는 중요 통로로 역사에 자리매김하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에는 장건의 여행이 기폭제가 되었음이 분명하다. 그 결과로 인해 사람들은 서쪽 여행을 떠난 최초의 인물로 그를 기억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동서 교역로의 활성화 과정에서 반드시 염두에 둬야 할 것이 있다.
장건의 여행 이전에 초원을 통일하고 오아시스를 지배하며 융성했던 흉노라는 유목제국이 400 여년이나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흉노는 중국과의 관계를 바탕으로 동서 교통로를 장악했으며 여기에서 나오는 이익을 장악함으로써 크게 성장했고, 이런 움직임이 궁극에는 동서 교류의 활성화를 촉발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흉노의 움직임을 견제하기 위해 한나라가 직접 나서게 됐고, 그 결과 동서 교통로는 새로운 발전의 기회를 얻어 다방면에 걸친 문화 교류로 이어질 수 있었다. 이런 움직임은 그 뒤에도 흉노를 이은 여러 유목제국의 등장과 이를 견제하려는 중국의 계속된 노력으로 반복되었다.
이것은 동서 문명권을 잇는 ‘실크로드’의 발전사에 바로 전근대 세계사를 이끈 두 수레바퀴인 정주 농경 세계와 유목 세계의 지속적인 대립 갈등의 역사가 내재돼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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