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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 실크로드 열전] : 현장의 서역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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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임영애 댓글 0건 조회 6,304회 작성일 15-11-22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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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현장의 서역기행...걸어서 110개국
 
실크로드를 이야기하자면 당나라 시절의 서역기행을 빼놓을 수 없다. 그 주역이 현장(玄奘, 602~664)이다. 그는 당나라 초기 뛰어난 고승이자 불교 경전 번역가였다. 우리에게는 삼장(三藏)법사로도 유명하다. 경장(經藏), 율장(律藏), 논장(論藏)에 두루 통달해서 얻은 별칭이다.
 
◆삼장법사 여행길에 손오공은 없었다
 
삼장법사라는 이름이 우리에게도 친근한 것은 ‘서유기(西遊記)’ 덕분이다. 명나라 시대의 소설 작품에 나오는 기상천외한 기행의 주역이 삼장법사다. 그가 천축으로 불경을 구하러 가던 도중 손오공, 사오정, 저팔계를 차례로 만나 일행이 되어 겪게 되는 무용담은 다양한 형태로 각색돼 국내에도 소개됐다. 하지만 그 내용은 어디까지나 소설일 뿐이다. 현장이 불경을 구하러 서역기행에 오른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아무런 일행도 없이 홀로 모험의 길을 나섰다.
 
그가 인도로 가기 위해 중국 국경을 넘은 때는 629년(唐太宗 貞觀3年) 8월, 그의 나이 28세 되던 해였다. 당시 즉위한 지 4년밖에 되지 않은 당 태종(599~649, 재위 626~649)은 백성의 어느 누구도 중국 땅을 벗어나 실크로드로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현장은 혼자서 월경을 감행했다. 불법(不法)이었다. 이유는 단 하나, 바로 ‘불법(佛法)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17년간 2000km 기행...130개국 견문
 
그렇게 시작된 현장의 여행은 햇수로 무려 17년이 걸렸다. 오랜 세월 동안 그가 직접 걸어서 다닌 나라만 해도 110개국이었다. 귀로 전해들은 20여개국까지 포함하면 그가 직간접으로 접한 나라는 130개국이 훌쩍 넘는다.
 
그가 다닌 길을 거리로 계산해도 총 5만여리, 지금의 단위로는 2000km에 달한다. 중앙아시아와 인도의 불교 유적지 가운데 그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현장은 그 긴 시간 각지의 대덕(大德, 고승)들을 찾아 다니며 스스로 불교의 깊은 뜻을 터득했다. 드디어 645년 1월 무사 귀환했다. 장안으로 돌아오면서 그는 경전 657부와 부처의 육사리(肉舍利) 150과, 석가상 7구를 갖고 왔다. 떠날 때 국법을 위반했던 터여서 귀국 후 죽음을 각오했지만, 뜻밖에도 당 태종은 그를 열렬히 환영했다.
 
당 태종의 입장에서는 그럴 만했다. 현장이 17년간 보고 들은 중국 서쪽 나라들의 정보는 더할 수 없이 요긴한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당 태종은 그가 가져 온 경전을 전시 보관하기 위해 652년 장안에 대자은사(大慈恩寺)를 지었다. 그 안에는 대안탑(大雁塔)을 세웠다.
 
대안탑은 원래 50여미터 높이의 오층탑이었으다. 하지만 화재 등으로 인해 세 차례 중수를 거쳐야 했다. 현재 7층(64m)인 모습은 17세기에 중수한 것이다. 탑의 1층 출입구 좌우 벽에는 652년 태종이 현장에게 하사한 ‘대당삼장성교서비(大唐三藏聖敎序碑)’와 고종의 ‘술삼장성기(述三藏聖記)’ 비가 세워져 있다. 이 두 비석에도 현장은 ‘삼장’으로 언급되고 있다.
 
◆12권에 7세기 중앙亞-인도의 모든 것 담아
 
현장의 ‘대당서역기’는 646년 7월에 완성됐다. 모두 12권으로 편성된 ‘대당서역기’는 엄밀하게 말하면 여행기라기보다는 지리서에 가깝다. 그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다. 7세기 전반 중앙아시아와 인도에 관한 유일한 기록이다.
 
당시 그 지역의 기후, 풍토, 민족, 습관, 언어, 물산, 종교, 미술, 전설 등이 상세하게 담겨있다. 그런 ‘대당서역기’는 당 태종에게도 아주 중요했지만, ‘지금 이곳’ 실크로드를 연구하는 학자들로서도 필독서라 할 만하다.
 
사실 이 책은 현장이 직접 쓴 것은 아니었다. 그가 체험하고 견문한 내용을 다른 승려인 변기(辯機)에게 구술해 집필하도록 한 것이다. 변기는 왕의 칙령으로 645년부터 현장의 경전 번역을 돕기 시작했다. 짧은 기간에 무려 4부의 경전 번역을 마쳤다. 그만큼 총명했다. 하지만 변기는 자신의 기량을 다 펼치기도 전에 극형에 처해졌다. 황제의 딸, 그것도 기혼의 여인을 사랑한 죄값이었다.
 
현장의 ‘대당서역기’는 법현의 ‘법현전’, 혜초의 ‘왕오천축국전’과 함께 3대 여행기로 손꼽힌다. 이들 세 구법승 중에서도 가장 오랜 기간 여행하고, 가장 많은 국가를 방문했던 인물이 바로 현장법사이다.
 
◆탈레반에 폭파된 바미얀 대불의 최초 문헌
 
그는 자신이 돌아본 7세기 인도와 중앙아시아의 상황을 정확하게 기억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아프가니스탄의 바미얀 대불에 관한 기록이다. 이 석불은 불행히도 2011년 탈레반의 폭파 만행으로 지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대당서역기는 그 바미얀 대불에 대한 최초의 문헌 기록이기도 하다. 중국을 떠난 지 3년 만에 아프가니스탄에 도착한 현장은 바미얀 국왕의 왕궁에서 공양을 받으며, 바미얀의 불교사원지 이곳저곳을 방문했다.
 
15일 동안 머물면서 그는 자신이 본 금빛 반짝이는 높이 38미터와 55미터의 대불에 대해 기록을 남겼다. 55미터 높이라면 지금으로 치면 20층 아파트 높이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크기다. 이곳을 오가는 사람들에게 이정표가 돼주었을 거대한 금빛 불상은 현장에게 꽤 큰 충격이던 모양이다.
 
그는 귀국길에 들른 중앙아시아의 호탄에 관해서도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 그 기록이 얼마나 믿을 만한지는 이곳에서 발견된 유물들이 그대로 입증해 준다. 특히 호탄의 한 사원지 벽면에 그려진 용녀전설도(龍女傳說圖)는 ‘대당서역기’의 내용과 정확히 일치한다. 용녀전설도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성의 동남쪽에 큰 강의 강물이 갑자기 끊겼는데, 왕이 알아보니 물속에 사는 용녀의 소행이었다. 남편을 잃고 홀로된 용녀가 새로이 지아비를 얻고 싶어 심통을 부린 것이었다. 이 때 나라의 한 대신이 자청하여 말을 타고 강물로 들어가 용녀의 남편이 되어 물길을 되살렸다.”
 
지금은 희미해져버린 벽화의 옛 사진에는 아름다운 용녀와 강물로 말을 타고 들어가는 대신이 그려져 있다. 대신이 타고 있는 점박말은 호탄 지역의 특산말이다.
 
◆고대 비단 전설에 관한 기록도
 
고대 비단 전설에 관한 그림인 잠종전설도(蠶種傳說圖)에 관련된 기록도 있다. “호탄 사람들은 뽕과 누에를 원했으나 구할 수가 없었다. 호탄왕은 중국에 혼인을 청했고 신부에게 뽕과 누에를 가져와 옷을 스스로 만들어 입으라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신부는 남몰래 뽕과 누에 종자를 구하여 자신의 왕관에 숨겨 호탄에 가져왔다.”
 
나무 위에 그린 이 그림은 20세기 초 영국 탐험가 오럴 스타인이 호탄에서 북동쪽 100킬로미터 떨어진 타클라마칸 사막에 있는 단단 윌릭에서 발견했다. 현재 영국박물관에 소장된 이 그림에는 호탄 사람이 뽕과 누에 종자가 숨겨져 있는 신부의 왕관을 가리키는 장면이 나온다.
 
현장이 귀국 당시 가지고 온 7구의 불상은 당시 인도의 각 지역에 봉안돼 있던 그림과 조각을 본으로 해서 만든 모각상(模刻像)들이다. 현장이 가져온 각종 경전과 불상은 장안에 도착하자마자 주작문 남쪽에 진열됐다. 많은 사람들이 와서 봤다. 그 다음 날에는 스무 마리의 말에 실려 떠들썩한 행렬과 함께 홍복사(興福寺)로 옮겨졌다고 한다.
 
그 후 이 유물들은 648년 12월 장안의 대자은사로 이송됐다. 당시 온 도시가 떠들썩했다고 한다. 당시 기록에 “경전과 불상을 갖가지 종류의 수레 위에 안치하고, 불상 앞 양쪽에는 각각 큰 수레를 배치했다. 수레 위에는 깃발을 단 긴 장대를 두었고, 그 뒤에는 사자(獅子)가 길을 인도하게 하였다. 당 태종과 황태자는 안복문(安福門) 누각 위에서 손에 향로를 들고 이를 보냈다”고 돼 있다.
 
현장이 가지고 온 7구의 불상에 대한 그 후의 내력은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그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적어도 당대의 불상 양식을 크게 변화시켰을 것은 틀림없다.
 
현장법사의 흥미로운 이야기는 이후에도 오랫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었다. 그 내용은 각색되어 희곡으로도 공연되었고, 원대부터는 본격적으로 책으로도 출판됐다. 그것이 바로 ‘서유기’이다. 애석하게도 원대 ‘서유기’의 원본은 남아있지 않다. 지금 우리가 읽는 ‘서유기’는 명나라 말인 1570년경 오승은(吳承恩)이 ‘대당서역기’를 기초로 찬(讚)한 구어체 장편소설이다.
 
◆경천사와 원각사 석탑의 원대 서유기
 
지금은 사라진 원대 ‘서유기’에 담긴 이야기의 장면이 흥미롭게도 한국의 경천사 십층석탑(1348년 국보 제86호)과 원각사 십층석탑(1467년 국보2호)에 새겨져 있다. 경천사 십층석탑은 대리석으로 만든 석탑인데, 잘 알려진 대로 친원 세력이 발원했고, 제작은 원나라 장인이 한 것이다.
 
경천사 십층석탑이 만들어지고 120여년 후인 1467년 지금의 탑골공원에 역시 대리석으로 원각사 십층석탑이 건립됐다. 두 기의 탑에는 각종 조각이 있는데, 바로 기단부에 ‘서유기’가 새겨져 있다. 기단부는 석탑을 도는 참배자의 눈에 가장 잘 띄는 부분이다. 이곳에 조각된 ‘서유기’는 명대 ‘서유기’가 간행되기 이전, 원의 ‘서유기’의 장면을 새긴 것이다.
 
현재 원대 ‘서유기’의 원본은 없이 단편적인 자료로만 확인되는 상황에서 이 두 탑에 새겨진 ‘서유기’의 장면은 더 없이 소중하다. 안타깝게도 두 탑의 ‘서유기’ 조각 부위는 손상이 심해 몇몇 장면을 제외하고는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고려 말과 조선 초의 우리 탑에 ‘서유기’ 이야기가 등장한다는 사실 만으로도 현장과 우리의 인연은 각별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임영애 경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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