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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의 공격(5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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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우헌기 댓글 1건 조회 6,332회 작성일 15-11-22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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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무슬림들은 비잔티움으로부터 안달루시아 사이 모든 지역은 여전히 돼지고기를 먹을 정도로 원시적인 사람들이 사는 원시림이 거의 전부이라고 인식. 수 세기동안 유럽은 게르만, 훈족, 아제르바이잔, 마자르, 스칸디나비안, 무슬림 등에게 침략을 당하면서 헐벗을 정도의 최저생활수준으로 까지 몰락. 인구의 대부분인 농민은 군사귀족과 성직자 계층(군사귀족에서 성직자를 배출)으로 구성된 상류층을 먹여 살리기 위해 허리가 끊어질 정도로 일했다. 상류층 자녀들도 성직자가 될 아이를 제외하곤 군사훈련 말고는 거의 배우지 못 했음.
 
0 11세기 어느 시점에 사소한 기술 혁신이 정점에 이르러면서 크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 첫째, 묵직한 쟁기의 발명으로 이전에는 농사를 지을 수 없다고 생각한 땅까지 개간하여 농토를 넓혔다.
- 둘째, 말의 어깨와 목 아래를 고정할 수 있는 가슴걸이를 발명하여 밭을 갈 때 황소 대신 말을 쓰기 시작했다. 말은 황소보다 50% 정도 빨리 발을 갈기 때문에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다.
- 셋째, 삼포작 방식의 도입. 농토를 격년으로 휴식년제를 실시하던 걸 3년 중 1년을 쉬게 해도 된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 덕분에 농사지을 수 있는 땅이 이전보다 1/6 늘어났다.
--> 이런 사소한 변화의 결과는 뭘까? 잉여농산물을 정해진 날에 교차로에 모여 교환하기 시작, 손에 넣을 수 있는 상품의 종류가 다양해지고 양이 늘어나면서 허리가 휘도록 일하던 시간을 쪼개서 상품으로 내놓을 수 있는 수공예품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 사람들이 모이던 교차로는 반영구적인 시장이 되었다가 소도시로 발전했다. 소도시에는 현금을 받고 팔 수공예품을 만드는 일만 따로 하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현금이 생기자 어떤 사람들은 대부분의 시간동안 물건을 사고파는 일만하며 여러 시장을 오갈 수 있었다. 유럽에 다시 돈이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부유한 사람들은 기적을 찾으려 사원을 찾아다니기 시작(여행)했다.
--> 가장 부유한 사람들은 그들이 성스럽게 여기는 땅, 지중해 동부로 순례의 길을 떠났다. 그들은 여행비를 지불하기 위해 금이나 은을 가지고 다녔고, 이들은 강도의 대상이 되었다. 이에 그들은 팔레스타인까지 가기 위해 무리를 지어 경호원을 고용하였다.
 
0 셀주크 튀르크족은 아바스와 파티마 왕조로부터 팔레스타인 지배권을 빼앗으려 했다. 무슬림으로 개종한 이들은 다른 어떤 무슬림보다 더 이교도, 특히 유럽인들을 광신적으로 업신여겼다. 유럽인 순례자들은 자신들이 푸대접받는다는 걸 알고 돌아갔다. 고문을 당하거나 살해당하는 것은 아니지만 매사에 무시당하고 모욕을 받았다. 이들 순례자들의 입을 통해 당한 모욕에 대한 분노와 풍요로움에 대한 질투심을 불러일으켰다.
 
0 1071년 셀주크 튀르크가 비잔티움 황제를 포로로 잡았다는 소식에 유럽은 충격을 커다란 받았다. 비잔티움 황제는 서양의 기사들에게 통합된 그리스도교의 이름으로 비잔티움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콘스탄티노플에 주재한 그리스 정교회 대주교는 로마 교황에게 전갈을 보내 콘스탄티노플이 무너지면 무슬림에 곧장 로마로 갈 것이라고 경고했다.
 
0 당시 유럽 귀족들의 땅은 장남에게 상속되고 나머지 아들들을 각자 알아서 살아가야했다. 반면 왕족들은 아들 수에 따라 왕국을 쪼개 나누어줌으로써 왕국들은 갈수록 작아졌다. 프랑스에서는 성 단위로 다스렸고,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단계에 이르면서 기사들이 생겨났다. 장자 상속으로 영지 없는 귀족이 대거 생겨났다. 이들은 전쟁이 아니면 달리 할 일이 없었다. 그러나 이들이 모두 나가 싸울 전쟁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러던 차 그들은 성지에서 이교도들에게 당한 모욕을 듣게 되었다.
 
0 1095년 교황 우르바누스 2세가 프랑스, 이태리, 게르만 귀족들에게 형제들이 예루살렘에서 튀르크족을 쫓아내도록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동쪽으로 가는 유럽인들이 십자가 모양의 붉은 천을 달아서 성전의 상징으로 삼자고 했다. 이렇게 십자군이 탄생하게 되었다. 그는 교황의 권위로 무슬림을 죽이러 예루살렘에 가는 사람은 죄를 부분적으로 면죄받으리라고 공포했다.
 
0 십자군이 처음 무슬림 세계에 나타났을 때 무슬림은 그들이 비잔티움 황제에게 고용된 용병일거라고 생각했음. 이 때 은둔자 피터라는 떠돌이가 농민, 장인, 상인, 심지어 여자와 어린이들까지 지원자를 불러 모았다. 이렇게 모인 수 만명의 무리가 처음 무슬림의 땅에 나타난 십자군으로 단칼에 붕괴되었다. 이듬 해 정식 기사로 구성된 십자군은 파죽지세로 도시들을 점령해나갔다.
 
0 무슬림 세계는 연합하여 대항하기는커녕 적전 분열을 일삼았다. 오랫동안 아바스와 셀주크와 맞서 싸우던 이집트는 비잔티움 황제에게 ‘지원부대’에 환영한다는 서한을 보냈다. 항복하면 안전을 보장하겠다는 거짓 계책으로 예루살렘도 점령했다. 영국 사학자 기번은 십자군이 예루살렘에서 이틀 동안 7만 명을 죽였다고 했다. 무슬림뿐만 아니라 로마 교회가 아닌 기독교인들도 박해을 받았다. 전교회 소속 기독교인들의(그리스, 아르메니아, 콥트, 네스토리우스) 재산도 몰수 하고 추방했다. 이들은 이 지역을 점령하고 십자군 국가를 건설했다. 예루살렘 왕국, 안티오크 공국, 에데사 백작령, 트리폴리 백작령이 그것이다.
 
0 십자군이 오기 직전 아사신은 시리아에 조직을 만들었다. 십자군이 도착했을 때 아사신은 아사신이 아닌 모든 무슬림의 적이었다. 시아파, 수니파, 셀주크 튀르크, 아바스 왕조, 파티마 왕조는 아사신과 십자군을 적으로 생각했기에 이들 양자는 사실상 동맹관계였다. 십자군이 치략해온 첫 세기 동안 무슬림들이 단결하려는 조짐을 보일 때마다 아사신은 핵심인물을 암살해서 혼란을 유발했다. 1113년 모술 총독이 무슬림 지도자 회의를 소집해 연합군을 조직하고자 했다. 모술 총독이 암살됨으로써 이 기도는 무산되었다. 이후 암살이 연이어 일어났다. 아사신은 1256년 몽골에 의해 절멸되었다.
 
0 모술을 통치하던 튀르크 장군인 장기는 알레포를 차지하고 이웃 여러 도시를 흡수해 마침내 통일 시리아의 왕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영토를 확장했다. 이로써 50년 만에 처음으로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사이 지역인 레반트 지역에 큰 무슬림 국가가 들어섰다. 그는 무슬림들에게 공동의 적이 있다고 규정하고 지하드를 외치며 그에 맞서는 연합군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약점을 개혁했다. 궁중에서 아첨꾼들을, 군대에서는 매춘부들을 없앴다. 1144년 에데사를 점령했다. 십자군 국가 4곳 중 한 곳이 사라지자, 이에 자극을 받은 유럽에서 2차 십자군이 일어났다.
0 장기의 아들 누르딘은 무슬림을 하나의 신앙(수니파 무슬림)을 단결시키도록 이끌었으며 지하드를 그들 인생의 목표로 세웠다. 부와 권력, 자아 성취를 위해서가 아니라 공동체를 위해 싸우는 정의롭고 성스러운 무슬림의 상을 부활시켰다. 그 다음에 나타난 지도자는 살라딘(살라 알 딘 유수프 이븐 아유브)였다. 그는 누르딘의 최고 장군 중 한 명의 조카였다. 1163년 누르딘은 이집트가 프랑코의 손에 들어가지 않게 먼저 이집트를 정복하라고 살라딘의 삼촌을 파견했다. 살라딘은 이 때 삼촌을 따라 이집트에 갔다. 이집트를 정복하자마자 삼촌이 죽자 29살인 살라딘이 자리(파티마 왕조의 수상)를 이어받았다. 누르딘은 파티마 왕조를 폐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칼리프가 죽자 살라딘은 이집트의 유일한 통치자가 되었다.
 
0 누르딘이 죽자 살라딘은 스스로 자신이 이집트뿐만 아니라 시리아의 왕이라고 선언했다. 군사 지도자로서 괜찮기는 했어도 뛰어나지는 않았다. 그의 권력은 근본적으로 사람들이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왔다. 아사신은 두 차례나 살라딘을 죽이려고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살라딘은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십자군 점령지를 대부분 되찾았다. 1187년 예루살렘을 되찾을 때도 우선 도시를 평화롭게 양도하라는 제안서를 보냈다. 그 대신 떠나고자 하는 그리스도교도들은 재산을 챙겨서 떠날 수 있고, 남고자 한다면 예루살렘에서 탄압받지 않고 자신들의 종교를 믿을 수 있고, 그리스도 성소들은 보호받을 수 있고, 순례자들은 얼마든지 오갈 수 있다고 했다. 결국 무력으로 점령한 뒤 학살이나 약탈은 하지 않고 모든 죄수는 몸값을 받고 풀어줬다.
 
0 예루살렘의 탈환에 자극을 받은 서유럽 군주 셋이 3차 십자군을 조직했다. 독일, 프랑스, 영국이다. 독일의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는 가는 도중 죽었고, 프랑스의 필립 2세는 아크레 항구를 점령하는 전투 후 지쳐서 돌아갔다. 영국의 리처드 1세만 남았다. 그도 살라딘과 협정을 맺고 돌아갔다. 이후 일어난 4차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약탈하느라 정신이 팔려 예루살렘까지 가지도 못 했다.
 
0 십자군은 약 200년 동안 지속되었다. 무슬림들은 십자군 전쟁을 두 문명의 충돌이 아니라 그저 ‘문명’에 드리워진 참사라고 봤다. 한 예로 무슬림들은 프랑코에게서 문명의 증거를 하나도 발견하지 못 했다. 아랍 왕자인 우사마 이븐 문키드는 프랑코를 “동물이 완력이나 공격성에서 우월하듯이 용기와 싸우려는 열정에서는 우월하지만 다른 무엇에서도 앞서지 못하는 짐승들 같다”고 묘사했다. 프랑코이 공격을 자신들의 생각이나 믿음에 대한 지적인 도전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0 더구나 십자군의 지중해 동부 해안에 사는 무슬림들에게는 심각했지만, 다른 지역에는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 했다. 메카, 메디나, 바그다드에는 침투하지 못 했다. 호라산, 박트리아, 인더스 계곡 사람들은 아예 모르고 지나갔다. 더구나 십자군은 무슬림 세계에서 딱히 서유럽에 대한 호기심도 불러일으키지 못 했다. 1300년대 초 유대인에서 무슬림으로 개종한 라시드 알 딘 파즈롤라가 쓴 ‘모든 역사의 모음집’라는 대서사시는 프랑크에 대해 피상적으로만 기술했다. 십자군이 이슬람 세계에 유럽의 문화를 옮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였다.

댓글목록

용광로순우님의 댓글

용광로순우 작성일

귀한자료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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