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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다라 미술(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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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우헌기 댓글 0건 조회 7,965회 작성일 15-12-08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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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인도 문화의 중심, 간다라다음으로, 간다라가 어떤 곳인지에 대해 이야기할까 합니다. 이것은 제 이야기인데요. 요컨대 이곳은 또 하나의 인도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간다라 미술의 기원이 알렉산더의 동방 원정과 그 뒤 이곳에 정착한 그리스인, 헬레니즘 문화에 연결되어 있음은 이미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지만 실제 간다라 불상을 만든 주체는 대부분 인도인이었습니다.지도를 보시면 간다라는 파키스탄 북쪽에 있습니다.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접경지대에 페샤와르라는 곳이 있고 그 주위에 분지가 있어요. 아래로 인더스 강이 흘러가고 있고요. 이 페샤와르 분지가 좁은 의미의 간다라입니다.역사적으로는 인더스 강 서쪽까지 포함해 부른 적도 있지만, 대체로 페샤와르 분지를 간다라로 불렀습니다. 문화적으로는 간다라 불교와 불교 미술이 퍼져 있던 곳을 넓은 의미의 간다라라는 뜻의 ‘Greater Gandara’라고 부르기도 합니다.간다라의 주민은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사람들입니다. 간다라는 간다리라는 사람이 살던 땅이라는 뜻이에요. 인도-유럽어족의 유목민이 남진해 기원전 1500년쯤 인도에 정착하는데, 그 한 갈래가 간다리였습니다.
알렉산더의 동방 원정 경로(실선은 육로, 점선은 해로)와 주요 전투지
▲ 알렉산더의 동방 원정 경로(실선은 육로, 점선은 해로)와 주요 전투지
사실 동서의 만남은 알렉산더 이전에도 있었어요. 이란과의 만남인데, 알렉산더가 오기 전에 이 땅은 페르시아 제국의 땅이었습니다. 아시아의 서반부가 다 페르시아 제국의 영토였지요.기원전 6세기-4세기 페르시아 제국이 지배할 때 간다라도 속주의 하나였어요. 페르시아 제국 수도 페르세폴리스에는 20여 개 지역에서 조공하러 온 사절들을 묘사한 부조가 있는데, 여기에 간다라와 박트리아에서 온 사람들도 새겨져 있습니다.그 뒤에 알렉산더가 온 겁니다. 알렉산더는 페르시아 제국의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 동쪽 끝까지 온 거죠. 알렉산더 뒤에는 아시아의 제국을 물려받은 셀레우코스의 제국이 됐고요. 박트리아에서는 그리스인 왕국이 독립해 남으로 뻗어 나갔습니다.여기 기원후 1, 2세기에 새겨진 간다라의 부조에 그리스식 옷을 입은 사람들이 나와요. 우리가 종족 구분할 때 가장 중요한 기준이 언어이고 미술에선 복장인데, 이건 확실히 그리스인 복장이죠. 바쿠스나 디오니소스와 관련된 주신제를 하는 장면입니다.이 지역 서쪽에는 알렉산더 후예들이 있었고, 남쪽 인도 본토에서는 기원전 4세기 말 큰 제국이 일어납니다. 바로 마우리아 제국입니다. 이 제국이 커지면서 서쪽의 알렉산더 후예들과 아프가니스탄에서 충돌하게 됩니다.
아쇼카왕 때 제작된 주두(기둥머리)와 오늘날 인도 국장
▲ 아쇼카왕 때 제작된 주두(기둥머리)와 오늘날 인도 국장
마우리야 제국의 시조인 찬드라굽타 마우리야의 손자가 유명한 아쇼카왕이죠. 그가 불교로 귀의해 후원자가 된 후 불교가 이 지역에 전해지게 됩니다. 이 사람이 붓다가 처음 설법했던 불교 유적에 남긴 커다란 기둥이 있는데, 그 주두(柱頭, 기둥머리)가 현대 인도의 국장(國章, emblem)이 됐죠.독자적인 문자와 말을 썼던 간다라아쇼카는 다르마, 즉 정법에 의한 삶을 강조하는 칙령을 제국 곳곳에 새겼는데, 명문을 보면 위쪽은 그리스 문자, 그리스어로 썼고, 아래쪽은 아람 문자, 아람어로 썼습니다. 아람어는 당시 아시아 서반부에서는 오늘날 영어와 같은 보편어였습니다. 이걸 보면 이 지역에서 그리스계와 이란계 사람들이 살았고 서로 소통하기 위해 이런 문자와 언어를 사용했다는 걸 알 수 있죠.페샤와르 분지에 새긴 칙령을 보면, 인도어를 쓰고 있어요. 인도어 중에서도 이 지역의 특별한 방언이 있어요. 간다리라고 부르는데요. 그것을 이 지역에서만 특별히 쓴 문자, 카로슈티라는 것으로 썼습니다.이 시기는 인도 역사뿐 아니라 문화사적으로도 굉장히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이때 인도인들이 비로소 문자를 쓰게 됩니다. 인도에는 오랜 종교 문학 전통이 있는데, 그럼에도 인도인 문자를 쓰게 된 것은 인더스 문명기를 제외하면 기원전 3세기 아쇼카가 돌에 새기게 한 것이 가장 오랜 유물입니다.이때 두 가지 문자가 나오는데, 하나는 인도 본토에서 쓰던 브라흐미라는 겁니다. 다른 하나는 간다라에서 쓰던 카로슈티 문자입니다. 인도 전역에서 브라흐미를 제외하고는 유일하게 간다라만 독자적인 문자를 갖고 있었어요. 카로슈티 문자는 아마 페르시아 제국에서 쓰던 아람 문자를 기원전 4세기쯤 변형해서 만든 것 같아요.브라흐미 문자의 기원은 좀 모호한데, 간다라의 카로슈티 문자 창안에서 자극받아 만든 게 아닌가 싶어요. 인도 지적 문화에서 혁명적 변화가 일어난 시기였습니다.
[미니북] 왜 간다라 미술에 매료되는가
이런 이야기를 왜 하느냐 하면, 간다라 지역이 인도 본토와 달리 독자적인 문자를 썼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언어로도 그렇고 문자로도 그렇고 인도 본토와 구별되는 전통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간다라의 불상도 만든 겁니다.그러니까 이 지역은 인도 변방이 아니고, 인도 아리안이 정착하면서 이미 상당한 수준의 문화를 구사하고 있었어요. 인도 본토에서 문자를 쓰기 시작한 것이 기원전 3, 4세기였지만, 이곳에서는 세계 언어학사에서 가장 정교한 문법책을 처음 쓴 빠니니라는 사람이 있었어요. 이미 상당한 지적 전통이 있던 곳이란 거죠. 변방이 아니라 인도의 다른 지역들과 문화적으로 경쟁하던 유력 지역 단위가 있었던 곳입니다.쿠샨 왕조 사람이 불상 만들기 시작간다라 미술이 본격적으로 흥성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후쯤인데, 여기에 새로운 사람이 등장합니다. 바로 쿠샨 왕조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원래 유목민이었어요. 중국 역사책에 돈황 부근에 살던 월지라는 종족이 나옵니다. 한나라 변방의 유목민들이죠. 이들은 인접한 또 다른 유목민인 흉노와 갈등하다가 패해 월지 왕의 두개골이 흉노 왕의 술잔이 되는 수모를 당합니다.그 뒤 서쪽으로 갔다가 다시 오손이라는 유목민에게 패해, 남쪽으로 내려가 지금 우즈베키스탄 남쪽과 아프가니스탄 북쪽의 박트리아에 자리잡았습니다. 그 바람에 박트리아에 정착했던 그리스계인들이 패해 남으로 쫓겨 내려가게 되지요.그런데 한나라 무제가 북쪽 흉노족을 치려는 과정에서 서쪽의 월지랑 협공하기 위해 사신을 보내게 됩니다. 그때 자원해서 서쪽으로 간 사람이 장건입니다.하지만 장건은 월지를 찾아가는 길에 흉노족한테 붙들려 거기서 결혼까지 하고 10년쯤 살았어요. 그러다가 도망쳐서 결국 박트리아의 월지에게 갔는데, 그 곳 사람들은 옛 원한은 다 잊고 흉노의 협공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어요.결국 장건은 빈손으로 돌아갔지만, 그 덕에 중국과 서쪽 간 교역과 교류의 길이 트였습니다. 또 덕분에 우리로서는 쿠샨이나 월지에 대해 쓸 만한 역사 기록을 갖게 됐지요.쿠샨은 아프간 북쪽 그리스계 사람들을 쳐부수고 한때 넓은 제국을 이뤘습니다. 인도 북부, 갠지스 강 유역 중부, 이란 동부, 중국 신강성 남쪽 지역까지 차지했습니다. 신강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아느냐 하면, 이 사람들이 인도어로 쓴 목판들이 니야라는 곳에서 다수 발견됐어요.이 쿠샨 시대에 불교 미술이 흥했습니다. 또 이때 비로소 불상이 제작되기 시작했습니다. 쿠샨 제국 화폐에는 부처라는 이름을 그리스 문자로 새긴 상이 보입니다. 불상을 만들 때 간혹 누가 이러이러한 상을 바친다고 명문을 새기기도 했어요.
[미니북] 왜 간다라 미술에 매료되는가
제 책에는 별로 담지 못했는데, 간다라 미술과 관련해 지난 20년 동안 불교학자들의 큰 관심거리였던 것이 있습니다. 간다라에서 나온 나무껍질 경전들입니다. 2000년 전쯤 필사된 불교 경전들인데, 그것이 다 이 지역 인도말로 돼 있습니다. 인도 본토와는 다른 정체성을 가진 말이지요.오늘날 우리는 인도 하면 하나의 인도를 떠올립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만 해도 하나의 한국이라고는 하지만 언제부터 ‘하나의 한국’이라는 생각이 등장했느냐는 것은 따져볼 문제 아닙니까?마찬가지로 과거 인도에도 몇 군데 중심지들이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기원후 400~500년쯤 되면 인도 본토의 갠지스 강 중류 지역이 완전히 인도 문명의 주류가 됩니다. 부처가 활동한 곳, 아쇼카의 마우리야 제국이 흥기한 곳, 고전 문화를 완성한 굽타 왕조가 번성한 곳도 이쪽입니다.하지만 같은 시기에 이쪽 인도와 함께 또 하나의 인도로서 인도 문명의 헤게모니를 놓고 경쟁했던 곳이 간다라라고 하겠습니다. 여기는 나름대로 다른 문자와 언어의 정체성이 있었고, 이들은 밖에서 들어온 문화에 대해 훨씬 개방적이었죠. 헬레니즘 문화유산이 있었기 때문에 더 개방적인 태도를 보였고 그것이 가장 잘 드러난 게 간다라 불상이라는 서양 고전 양식을 가진 미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그런데 기원후 400~500년경이 되면 이 지역의 간다리라는 말, 카로슈티라는 문자, 서양 고전 미술 양식이 다 자취를 감춥니다. 대신 인도 본토에서 흥기한 고전 산스크리트어, 브라흐미 문자, 인도 특유의 미술 양식이 이 지역으로 올라옵니다. 헤게모니 경쟁에서 서북쪽의 인도가 패하고, 드디어 갠지스 강 중류의 인도가 승리해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인도 문명을 형성하게 된 거죠.
[미니북] 왜 간다라 미술에 매료되는가
불교 미술의 기원, 간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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